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렵다.
일기를 쓰겠다는 다짐만 수천번 해봤지만 '오늘부터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라고 쓰여있는 각기 다른 사이즈의 수첩들만 쌓여갈 뿐(각종 사이트별 블로그도 예외는 아니다). 글쓰기는 나에게 여러모로 꼭 필요한 일이지만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업무 메일을 쓰거나 제안서에 들어갈 워딩을 고르고 다듬는 일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막상 마음속 나의 이야기나 무형의 감정을 형태가 있는 고정된 글자로 박제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물론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이긴 하다.
'나의 첫 상담기'라는 제목을 정하고 왜 글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냐면, 내 마음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쓰자는 보람이의 제안을 받고, 이번 기회를 통해 꾸준히 글을 써보자!라고 기뻐했으면서 결국 데드라인 당일, 굳이 여의도 카페까지 와서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자니 모든 완벽히 해야 해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의 모습이 나와서 그냥 내가 쓰고 싶은데로, 마음 가는 대로 쓰기로 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기,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기'를 이번 글쓰기의 목표로 정했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쓰는데 거창한 목표부터 세우는 것을 보니 벌써부터 불안하다.
커피+디저트와 함께 반나절 카페에 처박혀 있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아무튼, 내가 이번 글에 하고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나의 첫 상담에 대한 이야기다. 우연한 기회로 서울시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6월부터 시작해서 8월을 끝으로 약 2달 반 정도 매주 상담을 진행했다. 지지난주 선생님과 상담을 마무리하면서 느꼈던 감정들, 생각의 변화들을 정리해보리라 했지만 역시나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더듬어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애초에 심리 상담을 신청했던 이유는 그 당시 코로나로 매일 집에만 있으면서 회사, 가족, 인간관계 등 여러 스트레스가 쌓여있는 상태였고 무엇보다 주변 지인들과는 쉽게 나눌 수 없는 나의 마음속 고민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평소에 고민이 생기면 혼자 생각하기보단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풀곤 했었기 때문에, 말 못 할 고민이라는 게 있을 수 있고 혼자 품는 방법을 알지 못해 적잖이 당황하고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온전히 내가 끌어안아야 할 무게라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습관처럼 도움을 요청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을 만났던 첫날, 대충 적어 냈던 상담 신청 이유였던 직장과 가족에 대해서 겉도는 이야기만 30분 하다가 결국은 나의 진짜 고민은 이거라고. 나를 받아들였는데, 그게 정말 힘들다고 말하자 몇 초간 당황하며 흔들리던 선생님의 눈빛과, 모든 게 멈춘듯한 시간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을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이렇게 호기롭게 시작한 상담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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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할 때마다 선생님은 테이블 위에 휴지를 꼭 준비해뒀는데, 뭔가 머쓱한 느낌이 들어서 나에게 필요한 거냐고 여쭤봤더니 생각보다 많이들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상담하는 내내 단 한 번도 휴지가 필요한 순간은 없었고, 상담 내내 오열하면서 눈이 빨개져서 방을 나오는 내 모습을 생각했었는데 항상 너무 업되어있고 긍정 충만한 상태여서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조차 들었다. 그 이유는, 우선 시기적으로 내가 고대하던 독립의 시기와 맞물려 이미 많은 나의 고민들이 저절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 우울함과 무력함이 심해질 때마다 운동으로 극복해 왔던 내가 또 마침 운동을 새로 시작하는 시기도 맞물려, 운동이 끝나고 한창 업된 상태에서 상담을 받곤 했다. 어쩌다 보니 시기적으로 내가 행복감을 많이 느끼는 굉장히 레어 한 시간에 선생님을 만났는데, 굳이 억지로 우울한 이야기를 끌어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우울한 얘기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있어서 자꾸 '나는 괜찮다'는 결론을 이끌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자주 했던 말 중 하나가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였는데, 논리적으로 방법이 없는데 계속 이야기해봤자 감정 소모라고 생각했고, 선생님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선을 긋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셨다. 혹시 어린 시절 원하는 것, 또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했을 때 거부당했던 경험이 많은지 물어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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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화를 하며 스스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는데 이상하게도 질문을 받자마자 목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꾹꾹 눌러버려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집을 이사하면서 오빠와 내가 벽지를 고를 수 있었는데 기쁜 마음으로 신중하게 골랐으나, 가격 때문인지 내 방도 오빠가 선택했던 벽지로 뒤덮여 있었던 기억. 내가 좋아한 이불은 분홍색 꽃무늬로 가득한 내 이불이 아니라 푸른색과 무채색 위주의 오빠 이불이었던 기억. 태권도를 하고 싶어 오빠를 쫓아다니며 깍두기 역할을 했으나, 살색 쫄쫄이를 입고 무용을 다녀야만 했던 기억. 사고 싶은 운동화가 너무 남자애들 것 같아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귀신같은 오빠가 네가 좋아할 것 같다며 보여줬고, 그제야 기쁜 마음에 샀던 기억.
좋은 기억도 떠올랐다. 귀밑 3cm 칼 단발을 하고 있던 4~5살의 나는 넥타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아빠가 해외를 다녀오면서 종류별로 색깔별로 하나씩 선물해주곤 했다. 손가락만 한 나비넥타이를 하고 어쩌다 혼자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같이 탔던 어른들이 넥타이가 너무 이쁘다며 귀여워했던 기억들. 단발머리의 꼬마 여자 아이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걸 보고 그저 예쁘다고 했던 어른들. 선생님은 만약 내가 학교를 다니고 어른이 되면서 세상의 기준에 맞춰 타협하지 않았더라면, 단발머리의 나비넥타이를 맨 모습 그대로 이쁨 받고 자랐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목소리가 왜 그렇게 낮은지, 걸음걸이는 왜 그런지, 왜 그런 옷을 좋아하고 너의 취향은 왜 그러냐고 질문받지 않고 자랐더라면 어땠을지. 나는 건강한 가족 사이에서 문제없이 자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온 세상의 허들은 엄청 높은 거였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지쳐 실체 없는 자유를 갈망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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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검사를 통해 나의 기질 자체가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타입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울감이 찾아올 수 있다고 했다. 항상 그 부분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어야 하고, 나도 오랜 시간 단련이 되어 어느 정도 방법(운동, 술, 친구 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너무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괜찮을 나를 응원한다며 상담은 마무리되었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평범함보다는 본인의 시그니쳐가 될 수 있는 차별화된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슬프게도 나는 평범해지기 위해 평생을 부단히 노력했고, 어느 정도 평범해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며 멀어진 나비넥타이를 맨 단발머리 어린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톡톡 튀는 어린이, 내가 가장 나 다워서 제일 예쁨 받았던 시절. 이제는 넥타이에 관심도 없지만, 나의 '취향'은 매우 소중하고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번 상담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끊임없이 동경했던 자유로움의 실체가 '나 다움'이 매력으로 승화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라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