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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서른이 넘은지도 2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나는 나를 잘 모른다.

30대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20대에 비해 더 확고해지고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아서 덜 아프다고 누가 그러던데. 그래서 기대했건만 나의 30대는 20대와 같이 여전히 흔들리고 모호하고 답이 없다. 동시에 나이는 더 먹어서 더 불안함만 가중되었을 뿐. 그래도 앞 숫자가 2였을 때는 '아직 괜찮아, 젊으니까' 였다면 지금은 가만히 머무르고만 있어도 저절로 가라앉는 느낌이랄까. 가만히 있다가 벼락 거지가 될 것만 같다는 생각에(실제로도 그렇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불안함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있다. 특히 지난 2주, 상담에서 너무 행복하다고 까르르 웃으며 마무리를 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불안함이 내 몸을 휩쓸기 시작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이직을 위한 CV를 업데이트하겠다고 2주간 매일 밤 노트북을 열었으나 단 1글자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이직으로 가득하고 매일 퇴사하는 상상을 하는데, 막상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고 새로운 곳에서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단지 퇴사하는 상상만 할 뿐.. 

 

조그만 박스에 있는 느낌이다. 지금 내 행동과 감정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생산적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는 상태.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출하도록 멍석을 깔아주던 대학원 시절, 매주 업데이트를 해서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것에 지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몇 주를 그냥 흘려보낸 적이 있었다. 이미 많은 리서치를 진행한 상태였고 수많은 방향성 중에서 하나를 잡고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지나치게 엄격한 논리력에 번번이 부딪혀 조그만 박스 밖을 나갈 수 없었고 매주 어두운 낯빛으로 이상한 쓰레기 모델만 가져오는 나를 보고 멘토는 참다못해 나에게 2주의 시간을 주었다. 2주 동안 네가 좋아하는 거 아무거나 만들어보라고. 주제와 상관없고 졸업과 상관없이 내가 기회를 줄 테니 네가 평소에 좋아하던 만들기를 다시 해보라고, 지금은 네가 창작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게 가장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이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마시냐고 놀라며 물어보던, 동질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머나먼 서양인 교수였지만 그 순간에는 이 사람이 얼마나 나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는지, 홀로 처박혀 있는 박스 안에서 얼마나 나를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아무거나 막 만드려고 노력은 했다. 계란 껍데기를 깨는 기계를 만드려고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2주의 자유시간 동안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졸업이라는 큰 압박 속에서 온전한 2주의 자유를 스스로 허용하지 못했고, 성과를 낼 수 있는 2주의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에 2주를 할애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에 2주를 온전히 나를 창작의 행복을 위해 썼다면, 그래서 나의 졸업 프로젝트에 천금 같은 아이디어를 얻어 제때 졸업을 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박스를 나가는 방법을 알았을까? 박스에서 나오는 데 성공했던 경험이 없어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건지 생각했다. 이 박스가 너무 작아서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며 직장에서 업무를 했다. 

 

2주의 고단한 시간을 거쳐 그래도 하나 성과가 있다면 오늘 CV를 무려 10줄이나 썼다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직무와 경력을 가진 사람의 것을 보고 그대로 내용만 바꿔서 베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몇 줄 쓰다 보니 내 경력의 큰 틀이 잡혔고 좋아했고 잘했던 업무 성과들도 떠오르면서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뿐만 아니라 '태니지먼트'라고 하는 업무 강점 검사(https://tanagement.co.kr)를 했는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 강/단점이 있어 충격을 받고 스스로의 능력을 알아가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마음에 들 때까지 디테일을 바꾸는 성격이라 '완성'에 강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성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고 '탐구' 항목이 제일 높게 나왔다. 이직보다도 스스로 객관화가 먼저 되야겠다 싶어 내일 서점에 가서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이라는 책을 구매해서 읽어볼 예정이다. 이제는 약점을 보완하는데 시간을 쏟기보다는 강점을 더 강하게 하는데 쏟고 싶다.

 

같은 맥락에서, 파일명=내 이름으로 키노트를 만들어서 나의 강/단점을 정리하고 기업이 아닌 스스로 혼자서 할 수 있는 프로젝트,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소서는 단기에 마무리해야 할 과제라면, 키노트는 앞으로 계속해서 쌓아가면서 실행하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페이지를 늘려갈 예정이다. 블로그처럼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나의 소망 노트가 될 키노트